밤 열한 시가 넘어도 랩실 불은 그대로였습니다. 지도교수님께서 “실험 로그만 돌려놓고 퇴근하라”고 당부하셨지만, 모델 파라미터 튜닝에 꽂히면 시간 감각이 사라지곤 합니다. 그렇게 데이터 전처리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스윽 열어 본 순간, 스니커즈 리셀 커뮤니티에서 알림이 울렸습니다. ‘이번 주 출시된 한정판 러닝화 공동구매, 단체 주문으로 공홈 대비 -40%.’ 연구 스트레스로 눌린 마음을 달래 줄 쇼핑이 필요했던 터라, 저는 그 문장을 눈으로 삼키듯 쳐다봤습니다. 시세보다 싼 가격에 정품 보증까지 달려 있다니, 이미 댓글 창은 “입금완료”로 폭주 중이었습니다. 구매 기회를 놓치면 연구실 바닥을 더 오래 디뎌야 할 것 같아, 저는 곧바로 단체 채팅방 링크를 눌렀습니다.
‘품절 공포’가 만드는 틈
방에 입장하자마자 진행자가 재고 현황표를 띄웠습니다. 260, 265 사이즈만 노란색으로 남았고, 그마저도 ‘곧 마감’이라는 빨간 글씨가 반짝였습니다. 저는 평소 265를 신기에 얼른 손을 들고 싶었지만, 과도한 긴박감이 오히려 머리를 식혀 줬습니다. “이 가격에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데이터처럼 튀어나왔습니다. 판매자는 ‘정가 239,000원 → 공동구매가 139,000원’이라고 강조하며, “공식 대리점 폐점 세일 물량을 선점했다”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단, 결제 방법은 무통장 입금뿐이고, 카드 결제를 원하면 추가 수수료가 붙는다며 계좌 번호를 재촉했습니다.
리셀 시장 특성상 서두르는 문화가 있긴 하지만, 공동구매라면 최소한 카드 결제와 송장 추적이 가능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대리점 폐점 세일 물량이면 현금영수증 발급이 필수인데, 진행자는 “일괄 발급 후 이메일로 보내드린다”고 얼버무렸습니다. 귀에 거슬리지만 달콤하기도 한 그 대답은, 제 호기심을 더 자극했습니다.
사진도 진짜, 설명도 진짜… 같아 보이지만
진행자는 스니커즈 실물 사진 12장을 공유했는데, 조명 각도와 그림자가 일관돼 전문가 촬영본처럼 완벽했습니다. 저는 무심결에 이미지 한 장을 새 창으로 열어 해상도를 살펴봤습니다. 파일 이름이 ‘press_pack’으로 시작했고, EXIF 정보에는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본사 주소가 찍혀 있었습니다. 즉, 공식 보도자료에서 뽑아 온 사진이었습니다. 실물 인증이 아닌 ‘교재 속 예시’ 같은 느낌이 들어 속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직접 찍은 사진도 있냐”는 물음에 돌아온 답은 “대량 박스 상태라 촬영이 어렵다”였습니다. 그러면서 “구매 의사가 확실해야 창고 출입이 가능하다”는 이상한 조건도 추가됐습니다. 프리페이먼트를 받고 나서야 박스를 연다니, 데이터 검증 전에 레이블을 떼라는 격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한밤의 로그를 멈추고 시작한 뒤적이기
불안감이 임계치를 넘어가자 저는 실험 로그를 잠시 멈추고 브라우저 탭을 새로 열었습니다. 우선 공동구매 계좌 명의부터 조회해 봤습니다. 통장 주인은 개인 이름이었고, 사업자 등록이 된 업체 명의가 아니었습니다. 이어서 커뮤니티 게시글 URL을 복사해 검색하자 비슷한 내용이 일주일 전에도 올라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차이점이라면 그때는 다른 모델명을 앞세웠을 뿐, 가격 구조와 진행 방식이 동일했습니다.
결정타는 계좌번호였습니다. 저는 이제껏 사기 사례를 모아 두는 사이트에서 비슷한 계좌 패턴을 본 기억이 나, 빠르게 검색해 보았습니다. 결과 페이지 상단에 이 계좌로 인한 최근 피해 사례가 정리돼 있었고, ‘한정판 어글리슈즈 공동구매’라는 제목의 글과 물리적으로 일치했습니다. 덕분에 입금 직전이던 저의 손길은 그대로 멈췄습니다.
피해를 넘어 예방으로, 그리고 공유로
저는 공동구매 채팅방을 바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대화 캡처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커뮤니티 운영진에게 사기 의심 제보를 보냈습니다. 몇 시간 뒤, 진행자 계정은 삭제되고 채팅방도 폐쇄됐지만, 이미 입금한 분들의 피해는 늦게나마 속속 올라왔습니다. 저는 캡처본과 계좌 정보를 통합해 신고했는데, 관련 정보가 먹튀위크 데이터베이스에 추가됐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나 하나 살았으니 됐다’가 아니라 ‘다른 피해를 줄였다’는 기분이 들어, 연구 성과 발표 때보다 묘한 뿌듯함이 남았습니다.
지금부터 지킬 체크리스트
이번 일을 겪고, 저는 스스로 다섯 가지 규칙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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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세 대비 30% 넘게 저렴하면 무조건 출처부터 검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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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명의가 아닌 계좌로 공동구매를 진행한다면 일단 의심부터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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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 사진이 보도자료 용 고해상도인지 EXIF 정보로 확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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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 기한 압박과 과도한 친절이 동시에 나타나면 즉시 그 방을 떠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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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하다면 먹튀위크 같은 검증 커뮤니티에서 계좌와 닉네임을 역검색하기.
물론 이 규칙을 지킨다고 해서 리셀 실패의 아쉬움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데이터가 말해 주듯, 적어도 연구비와 생활비는 지켜낼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집니다. 저는 오늘도 새벽 실험 로그를 확인하며, ‘특가’라는 단어 대신 ‘검증’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기로 다짐합니다. 그게 손해를 막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사실을, 이번 사건이 분명히 증명해 주었으니까요.